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호법운동 (문단 편집) === 2차 군정부의 수립 === [[천중밍]]은 일단 구 국민당 출신으로 쑨원의 동지 출신이었으나 일찍이 [[황싱]]의 구사연구회 노선을 지지하는 등 쑨원과 사상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해롤드 시프린은 오히려 사상적인 라이벌 관계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11월 9일 오권헌법과 1당 지도에 의한 훈정계획을 삼민주의에 통합시키는 새로운 강령을 발표하는 한편, 천중밍에게 광동성장 겸 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여기에 주집신이 천중밍과 쑨원 사이의 중재에 나섰고 [[랴오중카이]], [[장제스]], 주집신이 두차례 천중밍을 만나 광저우로의 진격을 논하며 군자금을 제공했다. 결국 천중밍이 쑨원의 광동행에 동의하여 쑨원은 11월 28일 국회의원들을 거느려 광저우에 도착, 탕지야오, 오정방, 당소의 세 총재와 함께 정무를 처리하면서 2차 호법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920년은 [[안휘군벌]]의 [[돤치루이]]와 [[직예군벌]]의 [[우페이푸]]가 천하의 패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쑨원은 하루빨리 북방의 소요를 이용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천중밍은 연성자치론자로서 북벌에 큰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광동 인민들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무모한 북벌정책을 크게 비판적으로 보았다. 1921년 1월 12일 민우사 소속 의원들이 광저우로 돌아왔지만 익우사는 합류를 거부했고 정학회가 축출된 상태라서 국회의원은 200명이 겨우 넘었다. 이 때문에 정식국회가 아니라 비상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1921년 4월 2일 광저우에서 열린 비상회의는 군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식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고 4월 7일 <중화민국 조직대강>을 결의, 225명 중 213명의 찬성으로 쑨원을 비상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남방에서 정통 정부를 자처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자 당황한 북양정부는 1921년 광서로 물러난 루룽팅에게 광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천중밍은 오히려 루룽팅을 토벌하고 광서까지 점령하여 양광의 지배자가 되었다. 쑨원은 열강의 지지를 구하고자 했으니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쑨원은 미국의 원조[* 예컨대 미국이 중국에 지불하는 관세의 일부를 광동정부에 지원한다거나 말이다.]를 기대하여 대외선언을 발표, 조약상의 권리를 존중할 것과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워런 G. 하딩]]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3월에 보냈으나 미국 국무부는 메시지 수령을 거절하고 쑨원이 보낸 저서인 <실업계획>도 돌려보냈다. 5월에 하딩에게 보낸 편지 역시 반송되었다. 9월 쑨원은 다시 하딩에게 편지를 보내 민주주의의 모국이 광동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촉구했으나 이 편지는 하딩에게 전달되지조차 못하고 문서고로 들어갔다. 미국 국무부는 투자자들이 광동정부와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로지 북양정부만을 승인한다는 방침을 확고히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